Value Creator

* 별점 : ★★★
* 한줄평 : 쾌도난마 세계사
* 좋았던 점
 - 역사에 대해 부담 없이, 쉽고 가볍게 읽을 수 있다.
 - 조각적으로 알고 있었던 근현대사를 세계사적 관점에서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세계사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만드는 입문서
* 아쉬웠던 점
  - 단편적인 내용이 많고, 전체적인 이해를 하기 쉽지 않다.

1장. 인류 최초 대량 살육전 1차 대전

출처 :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
출처 :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

* 1차 세계대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이유 (31)

1차 대전이 우리의 관심을 받지 못했고 또 영화로도 만들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4년 동안 지루한 참호전만 했다. (2) 영상으로 보여줄 만한 대단한 전투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3) 뚜렷한 나쁜 놈이 없었다.

 

* 비스마르크의 등장, 그리고 오스트리아, 프랑스 제패, 토사구팽

1차 세계대전 이전의 독일은 통일된 국가가 아닌 분열된 상태였다. 난세에 영웅이 나타나는 법이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그 당시 지역의 강호였던 오스트리아를 꺾어 세력을 과시한다. 그리고 프랑스와의 전쟁을 선포하여 프랑스를 굴복시킨다. 이후 역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비스마르크는 통일 독일을 선포한다. 그러나 그 이후 전략적 외교를 고수하던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1세는 급진적인 젊은 세력들과 빌헬름 2세에 의해 토사구팽 당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며 세계대전의 단초를 만든다.

 

* 중국 칭다오에 독일 맥주 공장이 생긴 이유 (49)

독일은 산둥 반도의 칭다오 지역을 99년 동안 조차(남의 나라 땅을 무상으로 차지하는 행위)하는 권리를 얻었습니다. 독일인들이 그 이후 칭다오에 많이 건너가 거주하게 되었어요. 독일인들은 맥주를 좋아했기 때문에 칭다오에 맥주 공장을 건설하게 되었고요. 맥주 맛이 좋다고 하는 칭다오 맥주의 시작은 이러했습니다. 앞으로는 칭다오 맥주를 마실 때 빌헬름 2세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네요.

→ 일본이 청일전쟁의 결과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요동반도를 차지한다.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일본을 압박하여 요동반도를 중국에 되돌려주는데, 그 과정에서 각기 이권을 얻는다. (삼국간섭) 그리고 그 결과 칭다오를 독일이 조차하면서 칭다오 맥주가 생겨났다고 한다.

 

* 슐리펜 계획 (58)

슐리펜 계획은 1891년 독일 참모총장에 오른 알프레드 슐리펜 장군이 고안한 작전입니다. 만일 프랑스와 러시아, 동서 양쪽에서 전쟁이 동시에 일어난다면 러시아는 땅덩어리가 워낙 넓어서 총동원령을 내린다고 해도 전쟁 준비를 하는 데 최소 7주 정도 걸린다고 계산했어요. 그래서 전쟁 준비에 허둥거리는 러시아보다, 먼저 프랑스를 40일 만에 빠르게 점령한 다음 그 병력으로 다시 러시아 전선에 병력 수송용 기차를 보내 러시아와 맞서 싸우게 한다는 작전이었어요

→ 독일은 1차 세계 대전도 그렇고, 2차 세계대전도 프랑스를 선공격하여 점령하는 계획을 수립하였다. 1차 세계 대전때는 슐리펜 계획이 그런 계획이었다. 자신들이 유럽에서 패권을 확보하기 위해 가장 먼저 제압해야 할 강력한 적이 프랑스였기 때문이 아닐까? 당시 독일은 열차를 활용해서 인력과 물자를 빠르게 이동, 전쟁의 승기를 잡으려 했다. 그러나 전쟁은 계획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전쟁이다. 결국 계획이 틀어지고 지루한 참호전이 벌어진다.

 

* 전쟁터에도 크리스마스는 찾아오고 (67)

1차 대전이 발발한 1914년도 7월에서 시간이 흘러 어느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가 되었어요. 바로 이때 '1차 대전 전장의 기적'이라 불리는 일이 일어납니다. 어김없이 총격전이 끝난 24일의 밤, 독일군 참호 안에서 조용히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왔어요. 병사들이 부르기 시작한 겁니다. 노래를 들은 반대 진영의 프랑스, 영국군도 맞받아 캐럴을 부르기 시작합니다. 서로의 참호 속에서 참혹한 전쟁 중에도 그들에게 크리스마스가 온 것입니다. ... 이 소식이 양측 군 수뇌부에 들어갔어요. 격분한 양측 수뇌부는 '이거 안 되겠다. 이럴 때가 아니다. 지금부터는 속전속결이다'라는 생각에 대량 살상 무기를 전쟁에 투입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독가스였어요. 

 

* 탱크, 전투기, 전투용 잠수함의 등장 (68-69)

당시 탱크는 농사용 트랙터를 개조한 원시적인 형태로, 영국군이 처음 전장에서 활용하였다. 그리고 이 전차를 개발한 사람이 당시 영국 해군 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이었다. 그리고 초창기 정찰기에 불과했던 전투기는 비행기에서 서로 권총으로 조준하고 발사하는 수준이었으나, 이후 기관총을 달면서 무기화 되었다. 그리고 독일의 해상 보급로를 차잔하기 위해 잠수함이 등장하였다. 영국의 해상 봉쇄를 뚫기 위해 독일은 유보트를 사용해서 영국의 전함, 상선을 무차별 격침하였다. (유보트는 영어로 undersea boat) 그러다가 루시타이아 호라는 배를 침몰시키는데, 거기에 미국인이 128명 타고 있었고 그것이 미국의 참전 계기가 된다. 

 

* 러시아 혁명을 유발한 독일 (74)

1917년 3월 8일 '먹을 것을 달라'라고 외치던 시민들과 군대가 충돌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충돌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러시아 전역으로 확대되면서 '노동자 혁명'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독일은 러시아의 이 혼란을 이용해 러시아를 아예 무너뜨리기 위해 공작을 펼쳤습니다. 1917년 4월 당시 스위스에 머물고 있던 러시아의 급진 좌파 지식인 한명을 몰래 기차에 태워 러시아로 보내버린 것인데 이 인물이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이었어요. 그는 러시아 황제를 쫓아낸 후 러시아 혁명을 일으키고 나중에 소련이라는 나라를 세웠죠.

→ 독일은 좌로는 프랑스, 영국과 서부전선에서, 우로는 러시아와 동부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된 소모전, 참호전으로 전세는 기울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독일은 레닌을 활용해 동부전선에서의 승기를 잡기 위해 노력하였다. 

 

* 짐머만 전보사건 (69)

짐머만(치머만) 전보

독일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멕시코에게 비밀 전보를 보낸다. 만약 멕시코가 미국을 공격한다면, 텍사스, 애리조나를 다시 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전보를 보낸 사람이 독일의 외무 장관이었던 짐머만이었고, 이 사건을 '짐머만 전보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이 세계대전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게 된다. 

 

* 파리 강화회의 (78)

자,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정산을 통해 피해 보상받을 시간이 왔어요. 1919년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파리 강화회의'가 열렸습니다. 거울의 방이라는 장소와 1월 18일이라는 날짜를 택한 이유가 있습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의 패배 이후인 1871년 1월 18일에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가 이곳 거울의 방에서 프랑스의 패전을 알리고, 빌헬름 1세가 통일 독일 제국을 선포한 날이기 떄문입니다. 

 

2장. 치밀하게 계획된 2차 대전

출처 : 썬킴의 거침없는 세계사

* 카드 돌려막기, 대공황으로 돌아오다 (98-99)

경제 대공황 시기의 미국

모든 일은 '카드 돌려막기'로부터 시작되었어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요, 1차 대전이 발발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일단 총도 사야 하고, 대포도 사야 하고 병사들 먹을거리도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급전이 필요하니까 당시 신흥 대국이었던 미국을 통해 끌어다 썼어요. 그리고 미국에서 각종 물자도 일단 외상으로 빌려다 썼지요. 미국도 일단 외상이지만 영국과 프랑스가 물건을 왕창 사 가니까 장상가 잘되는가 보다 하고 신이 났습니다. 주가도 쑥쑥 오르다 보니 너도나도 주식시장에 뛰어들었지요. 그리고 전쟁이 끝났어요. 외상을 갚아야 할 시간이었지요. 그런데 막상 영국과 프랑스도 전쟁을 치르며 예산을 초과해 너무 많은 돈을 써버린 겁니다. 그래서 영국과 프랑스는 패전국인 독일에 빚 청구서를 보낸 것이고요. 그런데 독일은 당연히 돈을 갚을 능력이 없었어요. 나라가 거덜 났으니 원래 '독일 → 영국,프랑스 → 미국'순으로 카드 돌려막기가 돼야 하는 데 독일 자체가 거덜나는 바람에 '돈맥경화'가 걸린 겁니다. 

 

* 히틀러, 독소 불가침 조약을 어기다.

독소 불가침 조약,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전투

히틀러에게 희소식이 하나 들어옵니다. 스탈린이 소련 내 권력을 잡는 과정 중에 군부에서 무려 3만 명이 넘는 군 간부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는 소식이었어요. 군 지휘관이 전부 숙청당했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전쟁 수행 능력'이 없어졌다는 소리와 같은 것이었죠. 당연하죠. 병사들을 지휘할 브레인들이 없어졌다는 말이니까요. 그래서 히틀러는 결심했어요. 독소 불가침 조약서를 완전히 찢고서 소련 침공을 결정하기에 이릅니다.

→ 히틀러는 좌로는 프랑스와 영국을, 우로는 러시아를 상대해야 했다. 1차 대전때의 악몽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 프랑스를 침공하기 전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하고, 히틀러는 야욕을 드러냈다. 국제 정세에는 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적도 없다. 이익만이 있을 뿐이다.

3부. 일본, 미국과 맞짱 뜨다 태평양 전쟁

* 쇼군과 덴노 (147)

일본을 실제로 통치한 것은 무사정권의 실권자 쇼군이었다. 반면 정신적인 지주는 덴노(천왕)이었다. 즉 일본의 실질적 통치자는 쇼군, 상징적 국부는 덴노이다. 

 

* 개항기의 일본, 요시다 쇼인, 야스쿠니 신사

흑선(후로쿠네) / 요시다 쇼인 / 야스쿠니 신사

1830년대 일본은 에도 막부가 다스리던 때였다. 막부는 쇼군이 이끄는 군사정권이고, 에도는 현재의 도쿄이다. 즉, 도쿄에서 세력을 잡은 군사정권이 다스리던 상황이 일본의 개항기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권력싸움에서 밀려나고, 도쿠가와의 정치적 고향인 에도에서 막부가 설립, 운영되었다. 그러던 중 미국의 페리 제독이 이끄는 흑선을 통해 개항하였다. 

그 당시 일본은 임진왜란 이후 수백년 간 전쟁이 없어 사무라이들이 칼 대신 붓을 들고 일하는 공무원들이었다. 그들은 미국에 불평등 조약을 체결할 만큼 무능력한 에도 막부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해 노력했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이 요시다 쇼인이었다. 그는 정한론을 들먹이면서 세력을 길렀으나, 결국 막부 세력에 의해 제거되었다. 그를 기리는 신사가 야스쿠니 신사다. 이토 히로부미는 요시다 쇼인의 사상을 이어받은 수제자로서, 야스쿠니 신사를 짓고 그를 기리는 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 메이지 유신

메이지 유신에서 메이지 역을 맡은 당시 일왕

이러한 핍박들에도 불구하고 결국 하급 공무원들인 사무라이들, 특히 요시다 쇼인에게 감명받은 자들이 쿠데타를 일으키고, 결국 정권을 잡는다. 그들은 메이지 천황(덴노)를 왕으로 추대하고, 정치를 이끌어 나간다. 이 일이 메이지 유신이다. 젊은 정치세력들은 서양의 기술 뿐 아니라 정신과 제도, 철학까지 철저하게 답습하면서 근대 일본을 만들어 나간다.

 

 * 일본의 제국주의 전개과정 (청일전쟁, 을사늑약, 러일전쟁)

동학농민운동으로 인해 야기된 청일전쟁 /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된 슌판로(복집)

일본은 동학농민혁명을 이용해 조선데 대한 영향력을 확대한다. 톈진조약을 활용해 민비가 청나라 군사를 요청하자, 일본군도 함께 조선에 진군한 것이다. 그리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하고 시모노세키라는 곳에 있는 이토 히로부미가 좋아했던 복집에서 청나라와 조약을 맺는다(시모노세키 조약). 조선이 독립국인 것을 인정하는 조약이었으나, 이는 일본이 조선을 침공하기 위한 절차일 뿐이었다.

 

명성왕후는 러시아가 삼국간섭을 통해 일본을 압박하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러시아를 활용해 일본을 쫓아내려 하였다. 일종의 이이제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이러한 속셈을 눈치채고 명성왕후를 시해한다. (을미사변)

 

러일전쟁의 전개와 포츠머스 조약

삼국간섭으로 요동반도를 빼앗긴 일본은 러시아가 요동반도에 철도를 놓는 것을 관찰하면서, 전쟁을 결심한다. 요동반도의 여순항을 선제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발틱함대가 도착했으나, 너무 먼 항해를 한 나머지 힘없이 쓰시마섬에서 일본군에게 대패하고 만다. 결국 러일전쟁도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일본은 미국의 중재 아래 조선에 대한 지배력을 인정받는다(포츠머스 조약). 그리고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은 조선을 통치하는 것을 서로 합의한다(가쓰라-태프트 밀약). 이러한 일을 주도하고 중재한 공로로 루즈벨트는 노벨 평화상을 받고, 국제적인 명분과 인정을 얻은 일본은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조약을 체결한다(을사늑약).

 

* 일본의 대륙을 향한 야욕(만주사변, 중일전쟁)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푸이

일본에는 관동 대지진이 일어나 내부적인 분노가 들끓었다. 이 때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등 헛소문을 퍼트려 공분을 조선인에게 귀속시킨다. 그리고 외부로는 중국으로 시선을 돌림으로써 내부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시도한다. 1931년 9월 18일 중국의 심양을 정복하고, 만주국을 세우며 중국의 마지막 황제 푸이를 앉힌다. 그리고 중국 본토를 향한 발톱을 드러내면서 중일전쟁을 시작한다. 

 

난징 대학살의 참혹한 진실(100인 머리베기)

일본군은 대륙 침략을 시작하며 베이징을 점령한 후 상하이를 점령하고자 하였으나, 큰 어려움을 겪고 점령에 성공한다. 그리고 당시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 대학살을 벌인다. 

 

* 미국의 등장과 태평양 전쟁 (진주만 공습, 미드웨이, 이오지마 전투, 사이판 전투, 오키나와 전투, 도교 대공습)

태평양전쟁의 전개 양상(좌) 그리고 종식(히로시마 원폭)

2차 세계대전이 한창 진행중일 무렵, 프랑스가 독일에게 점령당한다. 프랑스 세력권이었던 인도차이나가 무주공산이 되자, 일본이 야욕을 품는다. 미국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금수조치를 내린다. 석유 판매를 중단한 것이다. 일본은 매운 맛을 보여주기로 결정하고, 진주만 공습을 일으킨다. 미국은 미드웨이 해전, 사이판 해전 등을 통해 일본을 압박해 가기 시작하고,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종식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뿐 아니라 수많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강제노역, 강제징용, 폭격으로 사망하거나 실종되었다. 

 

4장. 아편전쟁에서 국공 내전까지 중국 근대사

영국은 면직물을 인도에서 수입하고, 판매하는 무역을 통해 큰 부를 축적하였다. 문제는 중국과의 교역에서 차를 너무 많이 수입하는 바람에 무역수지가 적자인 상태가 너무 심해졌다는 것이다. 영국은 인도에서나는 아편을 청나라에 팔면서 무역 적자를 해소하려고 노력하였다. 중국인들은 아편 중독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홍삼이 좋다는 소식을 듣고 조선의 홍삼을 구하기 위해 애썼다. 그 과정에서 거상 임상옥이 등장해 큰 부를 누린다.

 

청나라 황제는 청나라 조정 대신 뿐 아니라 자신도 아편에 중독되었던 것을 우려하며, 임칙서를 흠차대신으로 임명하고, 아편 무역을 단속하기 시작한다. 임칙서는 아편을 모두 바다에 던져버리고, 당시 무역을 관할하던 찰스 엘리엇은 홍콩으로 피신해서 본국에 도움을 요청한다. 당시 동양의 최고 강대국이었던 영국은 큰 무리 없이 영국 함선을 무찌르리라 생각했지만, 영국의 군함 2대가 청나라의 29척의 함선을 격파한다. 추가적인 전투 끝에 청나라 조정은 역국을 조차하기로 합의한다(아편전쟁, 광둥협정, 난징조약)

 

이러한 난세에 또다른 영웅, 쑨원이 탄생한다. 쑨원은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을 앞세워 중국의 근대화를 추구한다. 신해혁명을 통해 청나라 왕조를 타도하기 위해 노력한다. 중국 화교들도 본국의 혁명 소식을 듣고, 공화국에 봄이 왔다고 이야기하며 '공화춘'으로 가게 이름을 바꾸기도 하였다. 

 

쑨원은 청나라의 장군인 위안스카이에게 청나라의 마지막을 직접 마무리해주면 총통 자리를 내주겠다고 회유한다. 그러나 위안스카이는 청나라를 무너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쑨원도 겁박하고, 쑨원은 일본으로 망명한다. 쑨원이 세운 중화민국과 위안스카이가 세운 중화제국이 공존한 것이다. 그 이후 중국은 국공합작, 국공내전 등을 거치며 사회주의, 공산주의 국가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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